동아대학교 정은우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후원자들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후원자들

고려시대(高麗時代, 918-1392)는 불교가 국교로서 신봉되었기 때문에 신앙에 의한 불사(佛事)가 다양한 계층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불사는 주로 사찰을 창건한다든지 불상, 불화, 사경 등을 안치하는 것으로 많은 후원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후원이란 보시(布施), 단월(檀越)이라고 부르며 불교미술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조력자를 말한다. 후원자의 성격에 따라 미술의 재료나 수준, 내용이 달라지는 점에서 미술품 연구에서 후원자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후원자에 대한 분석은 불화는 그림에 쓰여 있는 화기를 통해, 불상은 복장물(腹藏物)에 포함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가능하며 관련된 문헌이나 기록을 통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1] 본 논고에서는 주로 고려 후기에 국한하여 불교미술의 후원자를 살펴보고자 한다. ­

도 1. 금강산 비로봉 사리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 1. 금강산 비로봉 사리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후원자는 왕실에서부터 귀족, 부원세력가(附元勢力家), 유학을 근본으로 하는 문인 계층 그리고 서민들까지 다양하다. 먼저 대표적인 후원자인 고려 왕실 계층은 왕과 왕비 그리고 그 가족들이며, 고려 후기의 경우에는 원(元) 황실과 그 가족들까지 포함된다. 이들의 발원은 주로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한 개인적인 바람이나 사후 명복을 빌기 위한 내세 신앙과 관련되며 때로는 나라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측면도 고려되었다. 대표적인 왕은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13)으로 다양한 종파의 승려들과 친했으며 불사 또한 대대적으로 행하였다. 궁전을 사원으로 전환한 민천사(旻天寺)의 창건과 불상 3천여 구의 조성은 유명하다. 그의 비인 왕숙비(王淑妃)는 1310년 가가미진자(鏡神社)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남겼다. 1346년에 제작된 연복사(演福寺) 동종은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1348)과 덕녕공주(德寧公主)의 발원으로 원 장인들에게 의뢰하여 제작된 것으로 현재 개성 남대문에 걸려 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도 즉위하기 직전인 1390-1391년 사이에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비로봉(飛盧峯)에 사리기(도 1)를 봉안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불사를 하였으며, 1383년 제작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은제아미타여래삼존상(銀製阿彌陀如來三尊像)의 발원자에도 이름이 등장한다.

이 사리기는 가족과 함께 발원하였는데 유리제 사리기, 은제도금 사리탑, 은제도금 팔각당형 사리기, 그리고 이를 모두 담은 외함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으며 왕실 발원의 불사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은제삼존불상은 1383년 4월에 제작되었는데 당시 이성계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동북면을 위무하고 있었으며, 이때는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이성계를 방문하였던 때이기도 하다. 이 발원문에는 아무런 직함 없이 이성계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2]

귀족들의 불교미술 후원도 유행하였다. 이들은 주로 소규모의 사찰을 창건한다든지 불상, 불화, 사경 등을 안치하였다. 불사의 목적은 의례적이지만 황제와 왕의 수명을 축원하면서 자신과 가문의 번영을 이어가고자 하는 세속적인 염원과 더불어 내세에서도 그 생활을 이어가고자 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또한 국가가 외부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외적의 퇴치를 위해 발원하는 경우도 있다. 청계사(淸溪寺)를 재건한 조인규(趙仁規, 1237-1308), 자신의 집을 금자대장사경소 (金字大臧寫經所) 로 삼았던 충렬왕 (忠烈王) 대의 가신 승지 염승익(廉承益, ?-1302), 도쿄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를 시주한 고위 관리 권복수(權福壽·權薄, 1262-1346), 금주 안양사탑(安養寺塔)을 중수한 장군 최영 (崔瑩, 1316-1388)도 후원자로 유명하다. 1348년 3월 경천사지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 높이 13.5m)을 발원한 고룡봉(高龍鳳)과 강융(姜融) 역시 부원세력가로서 자신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탑을 제작한 후원자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특이한 점은 여성 후원자들의 등장과 참여가 매우 높았던 점이며 그 주체는 군부인(郡夫人)과 비구니들이었다. 군부인이란 남편이나 아들의 신분에 따라 어머니나 부인 등이 고위층에 봉작된 것으로 본관의 지명을 붙여 수여된다. 예를 들어 장곡사(長谷寺) 금동약사여래좌상(金銅藥師如來坐像)의 발원문에는 28명의 군부인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 군부인 가운데에는 이언충(李彦冲)의 부인이었던 강녕군부인 홍씨(江寧郡夫人洪氏)와 최안도(崔安道, 1294-1340)의 부인인 박릉군군 구씨(博陵郡君具氏)가 해당된다. 최안도와 그의 부인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정원본(貞元本) 권31의 발원자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군부인은 남편이나 아들의 지위와 경제력이 그 부인에 직결된 당시 사회의 구조적 현상을 시사해준다.

비구니 역시 고려 여성 후원자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고려의 수도 개경에 있었던 정업원(淨業院), 안일원(安逸院)은 비구니 사찰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비구니 묘덕(妙德)은 1372년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간행하는 등 불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불교미술이라는 장르적 특성이기도 한데 비구니와 더불어 비구들의 활동과 후원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승려 육정(六精)이 발원한 센오쿠하쿠코간(泉屋博古館) 소장의 <수월관음도>, 정업원 주지겸 승통(僧統)이자 대선사(大禪師)를 포함하여 6명의 승려가 참여한 1323년 교토 지온인(知恩院) 소장 <관경16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가 유명하다. 이외에 불상에서는 몇백 명이 함께 참여하여 결사적 의미 또는 종파적 성격을 드러낸 승려 발원자가 더욱 많이 발견된다.

유학적 지식을 갖춘 문사들에 의한 불사도 이 시대의 독특한 특징이다. 문사들은 가치 기준을 성리학에 두면서도 승려들과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하면서 불교를 후원하고 동참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개인적인 신앙보다는 자신들이 모셨던 왕과의 인연이나 부모를 위하여 불사를 주도하는 경우도 있다. 즉 유교의 충효 사상을 실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복장물과 후원자의 성격

고려시대의 후원자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사례는 고려시대에서부터 시작하는 복장물 납입이다. 복장이란 불상의 몸 속에 각종 물목을 넣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행위는 인간과 같은 생명력의 부여와 바람을 이루려는 강한 기복불교적 성격을 드러낸다. 장인에 의해 제작되는 불상과 불화는 점안(點眼)과 복장물 납입을 통해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거듭나게 되는 점에서 복장 의식은 중요한 의례 과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3]

현재 발견된 고려시대의 복장물은 발원문을 비롯하여 경전, 사경, 다라니(陀羅尼), 후령통(喉領筒), 직물, 복식 등 다양한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물건들은 단순하게 물질로써 안립되는 것이 아니라 성물(聖物)로서 시대적인 불교 사상과 교리를 내포하며 의식과 함께 행해지게 된다. 그리고 경전에 입각한 의례 규정과 오방(五方)에 따른 우주적 질서를 구축하면서 발전하게 되며 조선시대(朝鮮時代, 1392-1910)에는 이를 종합한 『조상경(造像經)』이 편찬된다.

불상 제작에 나타나는 후원자의 신분은 제작 시기나 목적, 장소, 도상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복장물 가운데 발원문이 포함된 작품을 통하여 어느 정도 분석이 가능하다. 복장에서 발견되는 발원문은 정확한 조성 사찰 및 연대, 발원 목적 등을 알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제작에 참여한 시주자들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점에서 중요하다. 복장을 지닌 고려시대의 불상은 15점 정도되며 제작 당시의 발원문은 현재 총 6건에 3건의 중수발원문(重修發願文)이 남아 있다. 이 발원문들은 20-30cm 의 작은 크기에서부터 10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에 비단, 종이 등 각기 다른 재료를 이용하여 만든 원문으로 이 시기 후원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고려시대 발원문의 형식은 자신의 발원 내용과 이름을 적거나 또는 발원자 대표가 발원의 내용을 작성하고 연이어 자신의 이름을 각기 기재하기도 한다.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경우 어려운 한자 때문인지 수결(사인)을 하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써주는 경우도 있으며 ‘石金’ 즉 돌쇠와 같은 이두식 이름도 눈에 띄는 특징이다.

각 발원문의 앞 부분에 제목을 붙이는데 ‘천수관음주성원문(千手觀音鑄成願文)’, ‘관음주성결연문(觀音鑄成結緣文)’, ‘전인혁발원문(田仁赫發願文)’, ‘미타복장발원문(彌陀腹藏發願文)’, ‘성불원문(成佛願文)’, ‘대덕동발원문(大德同發願文)’ 등과 같이 천수관음이나 관음을 만들거나 부처가 되기를 희망하는 목적을 적어놓는다. 발원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후원한 시주자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는 점으로 고려시대 후원자의 성격과 신분, 규모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고려시대에는 직급에 대한 표시를 하지 않아 신분의 차이를 드러내지 않고 이름만 적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한 작품에 관여한 후원자의 수도 알 수 있는데 천수관음상은 307명, 문수사(文殊寺) 불상의 경우 214명, 장곡사 불상은 1,078명,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은제 불상은 273명이 참가하는 등 주로 결사적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원자의 수가 적은 사례로는 서산 부석사(浮石寺) 금동관음보살상으로 32명 정도이다.

예를 들어 1346년의 장곡사 불상은 후원자의 수가 1,078명이다. 이 불상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인 『직지심경(直指心經)』을 편찬한 백운화상(白雲和尙)이 주도했으며, 여성보다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낭장(郎將), 별장(別將), 판관(判官) 등의 공직자에서부터 성씨도 없는 일반인, 몽골식 이름을 가진 자, 하층민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상층 계급 구성원의 성별 구성은 남성이 평균 70%이상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천수관음보살상의 경우 남성이 61.7%, 여성이 38.3%를 차지한다. 장곡사 약사여래좌상의 경우 전체 상층 계급 발원자의 80.4%, 문수사 아미타여래좌상은 83.9%,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아미타여래삼존상(도 2)은 86%가 남성이었다.

도 2. 은제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발원문, 고려 1383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도 2. 은제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발원문, 고려 1383년, 삼성미술관 리움
도 2. 은제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발원문, 고려 1383년, 삼성미술관 리움

평균적으로 남성이 약 7-80% 이상 되는데 상층 계급의 남성이 적은 경우는 승려가 많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고려시대에 상층과 하층민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대체로 성씨를 소유한 남자라든지(향리층 이상 성씨 소유) ‘~氏’라 기재된 여성(양반의 적통소생 여성만을 호적대장에 기재)의 경우 상층 계급으로 간주되며 승려를 제외한 나머지는 하층 계급으로 분류한다.

후원자의 경우 시주 물목을 직접 명시하거나 목적을 밝히기도 한다. 시주 물목의 사례로서는 개운사(開運寺) 불상의 경우 ‘아끼던 말을 팔아 금을 구입하여 개금(改金)을 위해 시주한다’라든가 ‘불상의 중수에 오승포 1필을 시주한다’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도 한다. 시주 목적은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하거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많은 편이다. 때로는 두 살된 아기가 오래살기를 기원하는 내용도 있다. 발원자들의 목적은 자신의 수행과 득도 그리고 득도 후의 중생 제도를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부모와 친족의 극락왕생과 현존하는 가족의 무병장수로서 이는 불교 신앙에서 흔하게 확인되는 내용이다.

독특한 사례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인 안동 김씨 김방경(金方慶, 1212-1300) 가문이 발원자로 포함되어 있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의 1302년 발원문이다. 특히 여기에는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에 나오는 문구인 여성이 다음 세상에서는 남자로 태어나고자 하는 바람을 적고 있다(도 3). 즉 여인이 아니라 대장부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40권본 『화엄경』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과 아미타불의 48가지 서원에 나오는 문구이다.

또는 중국으로 가 바른 믿음이 있는 집에서 남자로 태어나 국왕이나 고관이 아니라 출가하기를 맹세하는 문구도 있어 흥미롭다. 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인데 불상이 제작된 1302년(충렬왕 28년)이 고려에 대한 원(元, 1271-1368)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한 시기였고 고려와 원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강한 나라인 중국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 3. 금산군부인 전씨 누이의 발원문
도 3. 금산군부인 전씨 누이의 발원문
도 4. 금동약사여래좌상, 고려 1346년, 충남 청양 장곡사
도 4. 금동약사여래좌상, 고려 1346년, 충남 청양 장곡사

죽은 이를 위한 극락왕생도 중요한 축원의 하나로 등장한다. 발원문에 영가(靈駕)라든가 망모(亡母), 망처(亡妻), 망매(亡妹) 등 죽은 자들을 후원자로 포함시키면서 이들을 함께 축원하였다. 이들은 주로 현세에 후원자의 가족이었던 인물들로서 죽은 이후의 극락왕생과 득도를 기원하고 축원하는 것이다. 이외에 고려 후기 불상 발원의 특징으로 가족 혹은 노비를 포함한 한 집안 전체가 불사 시주자로 이름을 쓴 경우도 많은 편이다.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상에서 나온 ‘주성미타복장입안발원문(鑄成彌陀腹藏入安發願文)’에는 부모, 고모와 이모, 백숙과 친척, 형제와 자매, 노비와 권속을 나열하면서 함께 집단으로 발원자로 참여하고 있다. 장곡사 불상에도 엄마가 아들이나 딸 등과 함께 가족 모두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기도 한다.

고려 후기는 몽고족과의 관련상 발원문에 몽고식 이름이 등장하는 시기적 특징을 보인다. 도르지(都兒赤), 김도르지(金朶兒只), 도르지(朶兒赤) 등 몽고인이나 고려인의 몽고식 이름으로 바꾼 사례등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이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에 나오는 ‘대원 바얀테무르 장수(大元伯顔帖木兒長壽)’라는 발원이다(도 4, 4-1). 발원문 상단에 작은 글씨로 기술되어 있는데 바얀테무르는 충혜왕(忠惠王, 재위 1330∼1332, 1339∼1344)의 친동생인 왕기(王祺), 즉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의 몽골식 이름이다. 공민왕은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의 아들로서 충숙왕 17년(1330)에 출생하여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원 황제의 명으로 입조한 인물이다. 즉 이 발원문은 공민왕의 장수를 위한 내용으로 생각된다.

도 4-1.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발원문, 고려 1346년, 충남 청양 장곡사
도 4-1.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발원문, 고려 1346년, 충남 청양 장곡사
도 4-1.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발원문, 고려 1346년, 충남 청양 장곡사

결론

이상으로 고려시대 후원자들의 내용 및 계층을 분석해보았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미술은 기록을 수반하거나 제작 당시 그대로 완전하게 남아 있는 작품은 적은 편이다. 현존하는 작품만으로 보면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이 불교미술의 후원자로서 활동하였으며, 후원자에 따라 작품의 수준이나 도상이 결정되는 것도 알 수 있다. 더불어 복장 발원문의 내용을 통해 후원자의 성격 및 그들의 목적과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즉 후원자 분석은 당시의 사회적 현상 및 정치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1] 정은우, 「고려후기 불교미술의 후원자」, 『高麗後期 佛敎彫刻 硏究』(문예출판사, 2007), pp. 15-52.

[2] 정은우, 「1383년명 은제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발원문의 검토와 의의」, 『이화사학연구』43(2011), pp. 165-194.

[3] 정은우, 「고려시대 불복장의 특징과 형성배경」, 『미술사학연구』286(2015), pp. 31-58.8.

참고문헌

鄭恩雨, 『高麗後期 佛敎彫刻 硏究』, 문예출판사, 2007.

정은우, 「1383년명 은제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발원문의 검토와 의의」, 『이화사학연구』43, 2011, pp. 165-194.

정은우, 「고려시대 불복장의 특징과 형성배경」, 『미술사학연구』286, 2015, pp. 31-58.

정은우, 신은제, 『고려성물: 불복장』, 경인문예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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