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대학교 박지선

고려불화의 제작기법과 재료, 그리고 장황

한국의 불화는 바탕재료인 직물 위에 천연광물로 만든 안료와 동물성 단백질인 아교(阿膠)를 접착제로 사용하여 그린다. 불화의 재료와 기법 그리고 장황은 시대적 상황과 후원자에 따라 달라졌다. 즉 불교를 국가적으로 후원하였던 고려시대(高麗時代, 918-1392)에는 불화의 제작에 값비싼 재료가 사용되었던데 비해 조선시대(朝鮮時代, 1392-1910)에는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값싼 재료가 이용되었다.

바탕직물

한국의 불화는 비단, 삼베, 모시, 그리고 면을 바탕재료로 사용하였다. 고려불화의 바탕재료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직조된 화견(畵絹)으로 색상이 안정적이며 격조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조직이 곱고 치밀한 비단을 이용하였다. 화견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정련하지 않은 생사(生絲)를 평직(平織)으로 직조한 것으로 일반적인 평직(도 1)과는 달리 날실 두 올이 서로 붙어있는 변화평직(도 2)이다. 고려불화의 화견은 양질의 생사가 고르게 직조되고 바탕면이 평활하여 채색하기에 적절하며 폭이 2미터가 넘는 큰 규모의 불화라도 이음새 없이 한 폭에 그려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고려불화의 화견은 전문 공방에서 고도의 제작 기술을 갖춘 전문 장인에 의해 직조된 것으로 짐작한다.

Fig. 1 Silk plain weave

도 1. 평직

Fig. 2 Silk woven with double warps like that used for Goryeo Buddhist paintings

도 2. 변화평직

이에 비해 조선불화는 비단, 삼베, 모시, 면 등의 다양한 바탕재료 위에 그려졌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고려시대와 달리 왕실의 후원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민간에서 제작하고 공급할 수 있는 재료가 쓰이게 되었고 이에 따라 비단 이외에도 다양한 직물이 바탕재료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불화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화면이 대형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좁은 폭의 직물을 여러 폭으로 연결하여 불화의 바탕재료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채색

불화에서 주로 사용된 색은 적, 녹, 청, 백, 황이다. 적색은 황화수은(HgS)(도 3)이 주성분인 주(朱)가 일반적으로 이용되었고 동물성 염료인 연지(臙脂)도 사용되었다. 녹색과 청색은 각각 원료광물이 석록(石綠)(도 4)과 석청(石靑)(도 5)이며 두 가지 모두 주성분은 구리(Cu)이다. 그런데 이 광물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산화구리로 변화하여 불화의 바탕재료를 열화시키고 배접지(褙接紙)마저 갈색으로 변색시킨다. 심한 경우에는 녹색 부분 전체가 탈락되어 버리기도 한다. 백색에는 연백(鉛白)(도 6)과 백토(白土)가 사용되는데 두 안료 모두 입자가 매우 고와 다른 안료와도 잘 섞인다.

Fig. 3 Vermilion

도 3. 주

Fig. 4 Malachite

도 4. 석록

Fig. 5 Azurite

도 5. 석청

Fig. 6 'Lead white'

도 6. 연백

Fig. 7 Gold

도 7. 금

금색(도 7)은 불화에서 아주 귀한 부분에만 사용되었으며 금박(金箔)과 니금(泥金)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금박은 금을 두드려 종잇장보다도 얇게 만들어 화면에 맞게 잘라서 붙인 것이며 니금은 금을 곱게 갈아 안료처럼 만들어 붓으로 표현하였다. 고려불화에는 주로 니금이 사용되었는데 입자가 매우 고와서 가는 선으로 불화의 문양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고려불화에서 문양 표현을 위해 사용된 금선을 살펴보면 녹색 안료 위에 그려진 것은 상당히 탈락된 반면 적색 안료 위에 그려진 것은 생생하게 남아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녹색은 안료의 입자가 크고 거칠어서 채색 후 상대적으로 화면으로부터 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반면 적색은 입자가 매우 곱고 치밀하며 착색력이 높으므로 그 위에 금선을 그렸을 때 접착이 용이하여 오래 보존된다. 고려불화에서 금색은 순도 높은 금니를 사용하여 문양뿐만 아니라 불보살의 피부색으로도 사용되었다. 반면 조선시대 불화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금색 부분에 값비싼 금니 대신 석황(石黃, orpiment)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제작기법

Fig. 8 Reverse of a Water-Moon Avalokiteshvara painting showing pigment applied to the flesh and garments

도 8. <수월관음도>의 뒷면, 보살의 피부와 천의의 채색 부분

화견 위에 그려지는 고려불화를 제작하는 방법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나무틀에 화견을 팽팽히 당겨 고정시킨 후 화견의 앞뒷면에 교반수(膠礬水)를 칠해 건조시킨다. 이후 앞면에서 먹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선에 의거하여 채색을 한다. 물론 고려불화는 제작 당시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정확한 제작 순서와 방법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고려불화는 화폭에 먹으로 밑그림을 바로 그리는 경우와 밑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뒷면에 붙이는 경우 두 가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앞면에서 먹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채색하는 경우에는 앞면으로부터 비쳐 보이는 먹선에 의지하여 뒷면에 입자가 작고 은폐력이 높은 안료를 칠한다. 이처럼 화면의 뒷면에서 채색을 하면 화견이 거의 투명하기 때문에 뒷면에서 칠한 색이 앞면에서 은은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 채색은 일반적으로 피부와 나머지 몇 부분으로 크게 구획하여 칠하는데 간혹 피부 이외의 부분을 보다 세밀하게 나누는 경우도 있다(도 8). 이처럼 뒷면에서의 채색 즉, 배채(背彩)가 마무리된 이후에는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다시 앞면을 보채하거나 수정한다. 처음 그렸던 윤곽선 즉, 밑선은 채색으로 인하여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앞면에서 다시 윤곽선을 그어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선이다. 이 때의 선은 먹이 아니라 채색 안료나 금을 사용한다.

장황

Fig. 9 Buddha Vairocana, Fudo-in, Toyonaka, Japan, showing traces of painted mountings

도 9. 그림장황의 흔적이 보이는 <만오천불도>, 고려 후기, 견본채색, 일본 후도인 소장

동아시아의 불화는 서양의 그림과 달리 비단이나 종이 같이 얇고 약한 바탕재료 위에 그려진다. 따라서 그림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그림의 뒷면에 밀가루 소맥풀을 이용하여 배접지를 여러 겹 붙여 바탕을 튼튼히 보강한다. 그리고 그림의 테두리는 문양이 있는 비단으로 장식하여 족자나 병풍 등으로 꾸미는데 이를 장황(粧䌙)이라 한다. 물론 그림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리고 그림이 놓여질 건축물의 규모에 따라 장황의 형태가 정해진다. 동양에서는 그림이 손상되면 뒷면의 보강재를 제거하고 배접지를 새로 붙이거나 장황을 다시 하여 그림의 수명을 연장시킨다. 따라서 현존하는 고려불화 역시 그 동안 수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고려불화는 제작된지 6-700년이 지났고 대다수가 일본의 박물관이나 사찰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에 제작 당시의 장황이 보존되지 못하고 일본식으로 개장되었다. 그리고 서양에 전하고 있는 그림들의 경우에는 전시와 보관이 편리하도록 족자의 위아래를 잘라내고 나무판에 붙여 액자의 형태로 변형시킨 사례도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당시 불화 장황이 어떠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일본 히로시마 후도인(不動院)에 소장되어 있는 <만오천불도(萬五千佛圖)>(도 9)에는 여래상이 그려진 장황의 흔적이 남아있어 고려시대 불화 장황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이처럼 그림의 사방 테두리를 채색하여 장식하는 것을 ‘그림장황’이라 하는데, 불화를 그릴 때 그림의 주위를 장식하는 부분까지 함께 그리는 것은 가장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조선불화(도 10, 11)의 상당수는 제작 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대부분의 불화가 그림장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시대의 불화는 일반 회화와는 달리 작품 제작 시에 화면의 사방 테두리를 채색으로 장식하였다.


Fig. 10

도 10. 그림장황이 된 조선시대 <지장시왕도>

Fig. 7 Gold

도 11. <지장시왕도> 의 그림장황 부분